첫 문장을 빌려드립니다 · 1화
1화. 반납되지 않은 첫 문장
비가 오는 밤이면 문장대여점의 간판은 더 또렷하게 켜졌다. 낮에는 낡은 중고서점처럼 보이는 골목 끝 가게였지만, 자정이 가까워지면 유리문 안쪽에 작은 문구가 떠올랐다.
첫 문장을 빌려드립니다. 결말은 직접 쓰셔야 합니다.
이서는 그 문구 아래에서 세 번째 야근을 하고 있었다. 직함은 문장 수리공. 실제 하는 일은 더 사소했다. 손님이 빌려 간 첫 문장이 너무 빨리 닳으면 보강해 주고, 시작한 글이 엉뚱한 장르로 새면 방향을 바로잡고, 반납된 문장에서 남의 기억을 털어냈다.
첫 문장은 물건처럼 빌릴 수 있었다. 대여료는 돈이 아니라 '아직 말하지 못한 진심' 한 줄. 가게 주인인 노마는 그것을 작은 유리병에 담아 서가 뒤쪽 냉장고에 넣었다. 이서는 그 방식이 늘 수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월세는 수상함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그날 마지막 손님은 젖은 후드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였다. 그는 이름을 쓰는 칸에 '무명'이라고 적고, 장르는 '실종된 사람을 찾는 이야기'라고 적었다. 이서는 익숙한 선반에서 첫 문장 하나를 꺼냈다.
그 사람이 사라진 날에도 우체통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다.
남자는 문장을 받아 들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대여 계약서 맨 아래, 결말을 직접 쓸 것이라는 항목에 서명하지 않았다.
"서명하셔야 빌려 드릴 수 있어요."
"결말을 제가 쓰면 안 됩니다."
목소리가 낮았다. 비를 오래 맞은 종이처럼 젖어 있었다.
"그럼 대여가 아니라 의뢰가 됩니다. 의뢰는 주인님이 받아요."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후드 그림자 아래 눈동자가 이상하게 밝았다. 그는 계약서를 접어 이서에게 밀었다. 서명란 대신 다른 문장이 적혀 있었다.
결말을 돌려주세요.
그 순간 가게 안의 모든 책등이 아주 작게 떨렸다. 냉장고 속 유리병들이 동시에 맑은 소리를 냈고, 계산대 아래 반납함이 안쪽에서 두 번 두드려졌다.
노마가 2층에서 내려온 건 그때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낡은 가디건 차림이었지만, 얼굴에 붙은 잠기운은 한순간에 사라져 있었다.
"그 문장 어디서 받았습니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빌려 간 첫 문장을 품 안에 넣고 문 쪽으로 물러났다. 이서는 반사적으로 출입문 잠금 주문을 눌렀다. 그러나 문은 잠기지 않았다. 유리문에는 바깥 골목 대신 낯선 계단이 비쳤다. 아래로만 이어지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생기는 빈칸 같은 계단.
남자는 그 계단으로 한 발 물러섰다.
"도시는 이미 끝까지 쓰였습니다." 그가 말했다. "누군가 마지막 문단만 숨기고 있을 뿐."
문이 닫히자 간판 불빛이 꺼졌다. 가게 안에는 비 냄새와 반납되지 않은 첫 문장의 빈 자리만 남았다.
노마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계산대 밑에서 검은 장부를 꺼내 이서 앞에 펼쳤다. 첫 문장 대여 기록이 줄지어 있었고, 오늘 날짜 옆에는 이상한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결말 분실.
"첫 문장이 반납되지 않는 일은 가끔 있어요." 이서가 말했다. "그런데 결말 분실은 처음 봅니다."
노마는 장부를 닫았다.
"처음이 아니야. 네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그 말과 동시에 이서의 머릿속에서 잊고 있던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오래전 자신이 이 가게에 처음 들어왔던 날, 누군가가 빌려줬던 첫 문장.
내가 사라진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