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식당 · 3화
기억 식당, 장부에 남은 대가
장부를 펼친 채 한참 서 있던 서윤은 결국 의자에도 앉지 못했다. 누렇게 마른 종이 위에 남아 있는 네 줄이 방 안의 공기를 바꿔 놓고 있었다.
2003년 7월 14일.
된장국, 달걀 추가.
뜨거울 때 먹어야 덜 서럽다.
서윤.
자기 이름을 남의 기억에서 먼저 맛본 것도 기이했지만, 그 이름이 오래된 장부 위에 적혀 있다는 사실은 그 기이함을 단번에 현실로 끌고 내려왔다. 서윤은 손끝으로 종이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힘을 조금만 잘못 주면 바스라질 것처럼 얇은 페이지였다.
장부는 생각보다 단순한 주문 기록이 아니었다. 첫 장을 넘기자 날짜와 메뉴 사이에 일정한 규칙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가격 칸이 비어 있었고, 어떤 날은 금액 대신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즉시, 보류, 유예. 음식값을 적는 장부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었다.
서윤은 두 번째, 세 번째 장을 넘기다 말고 손을 멈췄다. 방금 펼쳤던 첫 장과 거의 같은 잉크색으로 적힌 한 줄이 있었다.
대가 미수. 아이 쪽으로 이월.
문장을 읽는 순간 목 안쪽이 서늘해졌다. 그는 숨을 삼키며 그 줄 아래를 다시 훑었다. 이름은 번져 있었고, 날짜 일부도 지워져 있었다. 남아 있는 건 비, 아이, 이월 같은 단어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건 더 긴 설명이 아니었다. 이 식당이 대가를 단번에 걷어 가지 못했을 때, 누군가에게 미뤄 둘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서윤은 장부를 덮지 못한 채 주방으로 갔다. 식당 안은 이미 깊은 밤인데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자기 기억을 깨우는 음식은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남은 감각까지 한꺼번에 태워 먹을 수 있었다. 대신 잔향을 오래 붙드는 것으로 갔다. 마른 누룽지 몇 장과 묵은 생강 한 조각, 아주 약한 소금, 그리고 끓는 물.
냄비 안에서 누룽지가 천천히 풀릴 때, 오래된 종이 냄새와 볶인 쌀 냄새가 이상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에 젖었다가 겨우 말라 붙은 종이의 냄새, 너무 오래 눌러 붙어 쓴맛 직전까지 간 밥알의 냄새. 서윤은 그 둘 사이를 잇듯 국자로 물을 저었다.
첫 모금을 삼키는 순간, 혀끝에 아주 짧은 장면이 걸렸다.
낡은 형광등 아래, 젖은 앞치마를 맨 여자의 손.
장부를 넘기며 멈칫하는 검지.
그리고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
그 애 것은 아직 가져가지 마.
장면은 거기서 바로 끊겼다. 이어져야 할 얼굴도, 다음 문장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서윤은 방금까지 분명히 느껴졌던 누룽지의 고소한 끝맛 일부를 놓쳐 버렸다. 혀끝 어디쯤이 비어 버린 것처럼, 익숙한 맛의 마지막 결이 허공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컵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이번에도 대가는 설명보다 먼저 몸으로 왔다. 아주 작은 감각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도, 방 안의 균형이 살짝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기억 식당은 늘 이런 식으로 값을 매겼다. 크게 앗아가지 않아도, 정확히 필요한 자리 하나를 비워 두는 식으로.
문밖이 아주 조금 밝아졌을 즈음, 뒤편 출입문이 가볍게 두드려졌다. 서윤은 깜짝 놀라 장부를 덮었다. 이 시간에 식당 뒷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문을 열자 두부 상자를 안은 미숙이 서 있었다. 근처에서 오래 반찬가게를 하던 사람이라, 서윤이 식당을 넘겨받기 전부터 이 골목을 지켜본 몇 안 되는 목격자였다.
“불 꺼진 줄 알았더니 아직 안 잤네.”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내일 아침에 비 온다길래, 일찍 주고 가려고. 너희 냉장고 두부 다 떨어졌잖아.”
미숙은 상자를 내려놓다 말고 테이블 위 장부를 힐끗 봤다. 그 순간 표정이 아주 짧게 굳었다.
“그건 어디서 났어.”
서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미숙이 먼저 손을 털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장부 가까이 다가섰다. 눈빛이 갑자기 오래전으로 미끄러지는 사람처럼 달라졌다.
“아직도 남아 있었구나.”
“아는 장부예요?”
미숙은 페이지를 직접 만지지 않고 허리만 조금 숙였다. “예전 주인이 쓰던 거야. 그냥 주문장부가 아니었어. 보통 손님들 건 아니고, 그 집에서 따로 기록해야 하는 날만 적었지.”
“따로 기록해야 하는 날?”
미숙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말해도 되는지 스스로 가늠하는 얼굴이었다.
“네가 다 알 때가 온 건진 모르겠다. 그래도 하나는 말할 수 있어. 비 오는 날, 아이 데리고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어. 한 번이 아니었어. 그 사람은 늘 늦게 왔고, 늘 젖어 있었고, 아이는 밥을 제대로 못 넘겼지.”
서윤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장부 모서리를 더 세게 눌렀다.
“그 아이 이름이…”
미숙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장부의 열린 페이지 한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이 골목에서 그런 된장국을 끓이던 집은 여기밖에 없었어. 달걀을 꼭 하나 더 풀어 달라고 했던 것도 기억나. 아이가 목이 말랐는지, 아니면 울다 지쳐서 그런 건지, 뜨거운 걸 잘 못 넘겼거든.”
그 말은 노인이 더듬어 꺼낸 비 오는 식탁의 장면을 너무 자연스럽게 메워 주고 있었다. 서윤은 질문을 더 밀어붙이고 싶었지만, 미숙은 먼저 한 발 물러섰다.
“더는 내가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대신 한 가지는 알아둬. 그 사람, 딱 한 번 온 손님 아니었어. 비만 오면 다시 왔어. 어떤 밤은 그냥 식당 앞에 서 있다가 돌아간 적도 있었고.”
“왜요.”
미숙은 대답 대신 상자 위에 얹어 둔 손을 천천히 쓸었다.
“죄책감이 큰 사람은 배가 고파도 바로 문을 못 열어.”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더 묻지 못하게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가기 직전,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하나를 덧붙였다.
“예전 주인은 말했어. 어떤 대가는 그날 다 못 걷는다고. 너무 어린 쪽은 그대로 두면 부서질까 봐, 나중으로 미뤄 적어 둔다고.”
문이 닫힌 뒤에도 서윤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미숙이 남기고 간 두부 상자에서는 찬물이 조금씩 떨어졌고, 식당 안에는 누룽지 냄새와 젖은 종이 냄새가 아직 엉켜 있었다.
그는 다시 장부를 펼쳤다. 아까는 지나쳤던 페이지 안쪽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이 더 밀려 나왔다. 영수증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영수증 뒤에 손으로 덧적은 메모였다. 잉크가 많이 번져 절반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남은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했다.
…보호자 확인 전.
…아이 쪽으로 이월.
다음 비 오는 날, 다시.
맨 아래에는 이름처럼 보이는 두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정…
서윤은 종이를 든 손을 천천히 내렸다. 노인의 성을 지금 처음 안 것도 아니었고, 아직 정확히 읽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한 글자만으로 방 안의 공기가 다시 바뀌었다. 노인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한 이유, 그렇게 서둘러 다시 식당 문을 두드린 이유, 자기 이름이 왜 장부에 남아 있었는지. 흩어져 있던 장면들이 이제 막 한 점으로 모이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바로 그때, 아직 영업 시간이 아닌데도 앞문 종이 울렸다.
서윤은 급히 메모를 뒤집어 쥐고 홀로 나갔다. 문간에 서 있는 사람은 역시 회색 외투의 노인이었다. 그는 어젯밤보다 더 지쳐 보였지만, 이번에는 망설임보다 결심 쪽이 얼굴에 가까웠다.
노인의 시선이 서윤 손에 들린 종이와 테이블 위 장부를 차례로 스쳤다. 그리고 아주 오래 삼켜 둔 말을 꺼내듯 낮게 입을 열었다.
“그 장부에 아직도 이월이 남아 있습니까.”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노인은 젖은 어깨를 한 번 털고, 거의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날… 그 이름을 적어 달라고 한 건 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