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모드의 연인 · 3화
비행기 모드의 연인, 회수 시각 04:10
04:10까지 남은 시간은 열여덟 분이었다. 서하는 거래 로그에 찍힌 좌표를 다시 확인하고 가게 뒤편 사물함에서 오래된 유선 단말 하나를 꺼냈다. 무선이 없는 세상에서만 작동하는 장비는 늘 묵직했다. 그는 윤슬의 기기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혜화역을 지나 더 아래쪽으로 이어진 폐쇄 보관소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벽의 서울은 막 잠들기 직전이 아니라, 누군가 몰래 깨어 있는 시간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지하 보관소 입구에는 간판도 없었다. 대신 출입문 옆 벽면에 오래된 택배 보관함 광고처럼 보이는 패널 하나만 붙어 있었다. `아날로그 보관 / 동기화 금지 / 10분 단위 정산`. 서하는 손목시계를 보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안쪽은 창고처럼 보였지만, 냄새부터가 달랐다. 종이와 먼지 냄새 사이에 오래된 플라스틱이 데워질 때 나는 냄새,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너무 오래 재생된 뒤 남는 미세한 열기가 섞여 있었다.
철제 선반마다 회색 단말과 로컬 추모 기기, 감정 패턴 기록 칩이 번호표처럼 꽂혀 있었다. 상자 겉면에는 사람 이름 대신 태그가 적혀 있었다. `사과하지 않는 아버지`, `다시 웃는 첫사랑`, `마지막 통화 직전의 목소리`. 죽은 사람의 부재가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이 가장 비싼 값을 치를 기억의 모양이 상품처럼 분류돼 있었다.
서하는 이를 악물었다. 윤슬이 왜 기록을 찢어 숨겼는지 그제야 피부로 이해됐다. 이곳은 추모를 흉내 내는 시장이 아니라, 상실을 가장 비싸게 되파는 창고였다.
안쪽 카운터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단말은 켜져 있었다. 무선 연결 없이도 거래 내역을 불러오는 로컬 정산기였다. 서하는 윤슬의 기기를 꺼내 슬롯 옆에 붙였다. 처음엔 반응이 없더니 곧 화면에 회색 창이 하나 떴다.
`담보 항목 조회 / 대상: 윤슬`
그 아래에 익숙한 문장이 이어졌다.
`열람 권한 보류: 서하`
서하는 웃지도 못한 채 중얼거렸다.
“끝까지 나만 못 보게 해 둔 거네.”
그러자 윤슬의 기기가 작게 떨렸다. 이어 아주 낮은 숨소리가 스피커 틈에서 새어 나왔다. 1화에서 처음 들었던 것보다 더 피곤하고, 더 가까운 목소리였다.
“네가 보면, 멈추지 않을 줄 알았어.”
서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를 막은 게 너였어?”
“내가 부탁했어.”
기기 화면이 천천히 바뀌었다. 날짜는 기억 유출 사건이 터지기 사흘 전이었다. 윤슬은 한 불법 거래 목록에서 서하의 복원 로그와 감정 반응 패턴이 고가 입찰 품목으로 올라온 것을 발견했다. 오프라인 복원사인 서하의 작업 기록에는 죽은 사람의 마지막 대화 패턴을 정제하는 방법이 담겨 있었고, 그 기술과 서하 자신의 애도 반응 데이터가 묶이면 상업적으로 아주 비싸게 팔릴 수 있다는 내부 메모가 남아 있었다.
그 아래에는 더 짧고 더 잔인한 줄이 있었다.
`부가 자산: 윤슬 개인 추모 모델`
윤슬은 그날 밤 거래를 막기 위해 내부 접근 권한을 훔쳐 썼다. 완전히 지워 버릴 시간은 없어서,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자기 추모 모델과 서하의 관련 기억 일부를 하나의 담보 묶음으로 엮고, 열람 권한을 서하에게서조차 숨겨 버렸다. 누군가가 서하 쪽 기록에 접근하려 들면 담보 쪽도 함께 잠기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서하는 화면을 읽다가 손을 떼지 못했다. 화를 내고 싶은데, 그보다 먼저 이해가 와 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윤슬은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보다 서하 쪽을 먼저 가렸다. 자기 흔적이 팔리는 것보다, 서하가 누군가의 표본이 되는 쪽을 더 끔찍하게 여긴 것이다.
“그걸 나한테 말하면 됐잖아.”
오래된 스피커에서 아주 약한 숨이 흘렀다.
“네가 알면... 네가 먼저 뛰어들었을 거야.”
그 말이 맞다는 사실이 서하를 더 괴롭게 했다. 그는 이미 여기 와 있었다. 윤슬이 죽은 뒤에도, 잘려 나간 기억 뒤에도, 결국 가장 늦게 와서 가장 깊이 뛰어든 사람처럼 서 있었다.
화면 아래쪽에서 새 경고창이 떴다.
`최종 열람 해제 필요`
`대가 항목 선택`
목록은 하나뿐이었다.
`서하가 보존 중인 윤슬의 안정 음성 샘플 1개`
서하의 숨이 멈칫했다. 그가 아직까지 가장 선명하게 간직하고 있던 목소리 조각이었다. 윤슬이 비 오는 날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 뚜껑을 반쯤 덮어 주며, “뜨거울 때 먹어야 덜 서럽다”고 웃던 음성. 1화와 2화에서 다른 장면들은 이미 흐려지기 시작했지만, 그 한 문장만은 아직 또렷했다. 그건 유언보다도 오래 버틴, 살아 있던 윤슬의 목소리였다.
기계는 선택지를 다시 띄웠다.
`해제한다 / 유지한다`
유지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도 짧게 적혀 있었다.
`진실 보류. 담보 회수 04:10.`
해제하면.
`진실 공개. 음성 샘플 영구 소거.`
서하는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이곳에 진열된 수많은 목소리와 감정 패턴을 둘러보고 나서야, 자기가 붙잡고 있는 것이 단순한 추억 한 장면이 아니라 누군가 계속 팔고 싶어 하는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윤슬의 목소리를 지키고 싶었다. 그건 너무 당연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윤슬이 막으려 했던 거래를 그대로 두는 것도 결국 같은 종류의 배신처럼 느껴졌다.
그는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고 `해제한다`를 눌렀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했다. 그러다 윤슬의 기기에서 아주 짧은 웃음 비슷한 숨이 흘렀다. 서하는 반사적으로 그 소리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또렷하던 그 문장의 높낮이가 한순간 비어 버렸다. 단어는 남아 있는데, 누가 어떤 리듬으로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너무 오래 재생한 테이프의 한 구간만 매끈하게 닳아 버린 것 같았다.
서하는 의자도 없는 창고 바닥 위에서 한참 가만히 서 있었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잠금이 풀린 기록이 연달아 열렸다.
거래 시장 운영자 명단, 유출 사고 직전의 내부 메시지, 죽은 사람의 추모 AI를 묶음 자산처럼 평가한 보고서. 윤슬은 사고 당시 그 증거 일부를 외부로 빼내다 붙잡혔고, 마지막에 서하 관련 기록만큼은 완전히 팔려 나가지 않게 묶어 두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현장 사고로 처리됐지만, 적어도 시작은 우연이 아니었다.
화면 끝에 윤슬이 남긴 마지막 직접 메시지가 열렸다. 이번 목소리는 앞선 안내나 단서보다 훨씬 낮고 느렸다. 이미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남긴 사람의 속도였다.
“네가 이걸 듣는다는 건, 내가 끝까지 숨기고 싶던 걸 결국 네가 고른 거겠지.”
서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 음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 넌 그 말 싫어했으니까. 대신 하나만 부탁할게. 나를 완전히 기억하는 것보다, 우리를 팔지 못하게 만드는 쪽을 골라 줘.”
짧은 정적 뒤에 더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네가 잃어버린 건 나 전부가 아니야. 누군가 잘라낸 자리 바깥에도, 너는 아직 나를 사랑했던 사람으로 남아 있어.”
서하는 단말 옆 유선 포트를 찾아 자신의 보조 저장장치를 꽂았다. 불법 시장의 서버는 외부망과 단절돼 있었지만, 공익 제보용 오프라인 보관소와 연결되는 감사 라인이 하나 남아 있었다. 윤슬이 마지막에 남긴 접근 키는 그 라인을 여는 데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철제 선반 끝의 표시등이 하나씩 붉게 바뀌었다. 거래 대기 상태였던 기록들이 잠기고, 정산 화면은 승인 대신 보류 메시지를 띄웠다. 누군가 뒤늦게 안쪽 출입문을 열려 했지만 이미 지연 잠금이 걸린 뒤였다. 거창한 폭발도 추격전도 없었다. 다만 이곳에서 팔리던 목소리들이 더 이상 상품 번호표로만 남지 못하게 된 순간이 조용히 지나갔다.
서하는 윤슬의 기기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지상으로 올라갈 때쯤 시계는 04:10을 막 넘기고 있었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조금 덜 막막했다. 진실을 얻은 자리가 곧바로 위로가 되진 않았다. 대신 이제 무엇을 잃었는지, 왜 잃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가게로 돌아와 셔터를 반쯤 올린 채 의자에 앉았을 때, 창문은 아주 옅은 새벽빛으로 흐려져 있었다. 서하는 마지막으로 기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더 이상 가장 선명했던 음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윤슬의 목소리는 군데군데 빈칸이 생긴 채 남아 있었고, 어떤 문장은 끝부분이 공기처럼 날아갔다. 그럼에도 완전히 침묵은 아니었다.
낡은 스피커 너머로,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숨이 하나 흘렀다.
서하는 그 앞에서 천천히 말했다.
“이번엔 안 숨길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도 알았다. 윤슬에게,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죽은 사람의 흔적을 물건처럼 다루는 세상 전체에게 하는 말이었다.
기기는 더 이상 단서를 주지 않았다. 대신 아주 짧은 잡음 뒤로 미세한 정적만 남겼다. 서하는 그 정적을 예전처럼 두려워하지 않았다. 완전한 목소리는 잃었지만, 왜 그 목소리를 놓아야 했는지는 알게 됐으니까. 그리고 이제야 윤슬을 붙잡는 방식이 아니라 보내는 방식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 첫 버스가 지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서하는 가게 간판 불을 끄지 않았다. `에어플레인 모드`라는 글자가 아직 어두운 거리 위에서 작게 떠 있었다. 모든 신호를 끊어야만 겨우 들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앞으로도 아마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