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모드의 연인 · 2화
비행기 모드의 연인, 사라지는 백업
혜화역 안쪽 계단은 새벽 네 시가 가까워질수록 더 낡아 보였다. 막차가 끊긴 뒤 남은 공기는 밤보다도 오래된 냄새를 품고 있었다. 서하는 에스컬레이터가 멈춘 통로를 지나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쪽으로 걸었다. 윤슬의 기기가 마지막에 뱉은 문장이 계속 귓속에 남아 있었다. 하늘계단, 두 번째 칸 아래.
계단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오래 닳아 가장자리가 반질거린 회색 돌, 모서리에 덜 닦인 먼지, 광고 스티커를 뜯어낸 자국.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손이 떨렸다. 그는 쪼그려 앉아 왼쪽 두 번째 칸의 깨진 부분을 더듬었다. 예전엔 윤슬이 장난처럼 피하던 칸이었다. 왜 그걸 이제야 떠올렸는지, 왜 그 습관을 잊고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손톱 끝에 금속이 걸렸다. 서하는 숨을 죽인 채 틈을 벌렸다. 안쪽에는 검은 실리콘으로 감싼 작은 메모리 키 하나와 반쯤 찢긴 영수증 뒷면이 들어 있었다. 영수증에는 물이 번진 듯 잉크가 퍼져 있었지만 한 줄은 읽을 수 있었다.
`클라우드 말고, 네 손으로 열어.`
그는 메모리 키를 꼭 쥔 채 가게로 돌아왔다. 해가 뜨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가게 문을 잠그고 다시 모든 신호를 끊자, 테이블 위의 윤슬 기기가 곧바로 희미한 불을 띠었다. 마치 그가 무엇을 찾아올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찾았네.”
서하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너 대체 뭐였어. 유언이야, 함정이야?”
기기는 잠깐 조용했다가 낮게 대답했다.
“둘 다 아니었으면 좋았겠지.”
서하는 메모리 키를 측면 슬롯에 밀어 넣었다. 딸깍, 하고 얇은 소리가 나자 화면 위 파형이 갑자기 두 배쯤 높아졌다. 이어 조각난 영상 로그가 아니라 감각이 먼저 덮쳐 왔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종이컵을 들고 웃던 저녁, 윤슬이 입김으로 컵 뚜껑을 데우며 했던 농담, 그리고 그 말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웃던 자기 얼굴. 너무 분명해서 순간 안심할 뻔했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 장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뭉개졌다.
윤슬이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웃는 입매는 보이는데 목소리 높낮이가 비어 있었다.
서하는 의자에서 반쯤 일어났다.
“...지금 뭐가 사라진 거야.”
“대가.”
기기의 대답은 너무 차분했다.
“네가 잠긴 기록을 열수록, 잘려 나간 자리 근처의 기억이 같이 흔들려. 누군가 이미 한 번 손댄 기억이라 더 쉽게 무너져.”
서하는 이를 악물었다. 1화의 경고가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렇게 빨리 몸으로 확인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제 와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기기 화면에 떠오르는 로그를 읽기 시작했다. 날짜, 시간, 접속 차단, 수동 백업. 그리고 일정하지 않은 간격으로 반복되는 같은 단어.
`grief mirror`
`private resale`
`behavior lease`
사람이 죽은 뒤 남겨진 말투와 습관, 감정 반응 패턴을 고가의 사적 상품으로 돌려 파는 비밀 거래. 윤슬은 그것을 발견했고,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듯 기록을 여러 군데로 찢어 숨겨 둔 것 같았다. 서하는 화면을 내려 읽다가 한 줄 앞에서 멈췄다.
`회수 실패. 대상자 기억 일부 절단 후 이월.`
그 아래에는 이름이 없었다. 대신 `H-S`라는 이니셜과 함께 오래된 위치 코드가 붙어 있었다. 윤슬은 한참 망설인 끝에 다음 음성을 열어 둔 것처럼 짧게 말했다.
“내가 사고로만 죽은 줄 알면, 넌 계속 같은 자리에서 멈춰 있을 것 같았어.”
서하는 손등으로 입가를 눌렀다. 화를 낼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윤슬이 살아 있을 때보다 지금 목소리가 더 가까운 게 이상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숨기고, 죽은 사람은 남겨 두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기기 하단에 마지막 파일이 하나 더 열렸다. 암호화된 거래 화면 캡처였다. 검은 배경 위에 회색 글자가 줄지어 떠 있었고, 상품명 대신 사람들의 잔향이 가격표처럼 나열되어 있었다. 그 목록 한가운데서 서하는 자기 이름을 봤다.
`서하 / 열람 권한 보류`
그리고 그 아래.
`담보 항목: 윤슬`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내려앉았다. 윤슬은 누군가의 고객도, 우연히 휘말린 피해자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 화면 안에서는 담보처럼 묶여 있었다. 서하는 화면을 넘기려다 오른손을 멈췄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기억했던 윤슬의 웃음소리가, 이제는 정확한 음색 없이 얇은 공기처럼 흩어졌다.
기기가 마지막 한 줄을 띄웠다.
`최종 회수 예정 시각 04:10`
서하는 시계를 봤다. 남은 시간은 스무 분도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