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엘리베이터는 지하로 내려간다 · 2화
2화. B4의 상행 대기자
44번 상자 안에는 낡은 수첩, 미니 카세트테이프 세 개, 방수 비닐에 싸인 명부 사본이 들어 있었다. 수첩 첫 장에는 아버지 필체로 날짜 대신 수치만 적혀 있었다.
278명.
지상 인계 완료 241명.
기록 누락 37명.
서진은 숫자를 한참 들여다봤다. B4가 단순한 대피층이나 불법 창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세 줄이 먼저 말해 주고 있었다. 명부 사본을 펼치자 이름, 생년, 임시 거주지, 인계 예정 시설, 비고란이 촘촘하게 이어졌다. 그런데 비고란 끝마다 같은 도장이 반복돼 있었다.
정산 보류.
홍수 직후 무영역 일대는 대규모 재개발 구역으로 묶였다. 서진은 그 시절을 어렴풋이 기억했다. 뉴스에서는 이재민 임시 이송과 생활 지원을 떠들었지만, 동네 어른들은 어느 집이 갑자기 사라졌는지 더 자주 이야기했다. 철거 보상 대상에서 빠진 가구들, 연락이 끊긴 세입자들, 임시 보호 명단에 올랐다고만 기록된 노인들. 어린 서진에게는 다 비슷한 어른들의 수군거림이었지만, 지금 명부를 들고 보니 수군거림의 모양이 선명해졌다.
B4는 사람을 태우는 승강장이 아니라, 지상에서 지워진 사람들을 잠시 붙잡아 두는 대합실이었다.
서진은 카세트 하나를 플레이어에 넣었다. 스피커에서 낮은 잡음이 지나가고 아버지 목소리가 나왔다.
"무영역 B4는 원래 침수 시 임시 대피 대합실로 설계됐다. 공식 운영은 11일뿐이었고, 그 뒤로는 없던 층이 됐다. 문제는 그 11일 동안 올라오지 못한 이름들이 있었다는 거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재개발 조합이 보상 대상을 줄이려고 임시 이송 명단과 지상 정산 명단을 일부러 분리했다. 시설 인계가 끝났다고 찍힌 사람들 중 몇몇은 실제로는 어디에도 접수되지 않았다. B4 명부에 남아 있는 이름들은 그 틈에서 떨어진 사람들이다."
서진은 무의식적으로 전광판을 돌아봤다. 서하늘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켜져 있었다.
"나는 이 층을 열어 둔 게 옳은 일인지 오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름까지 없애는 건 역무가 아니라 매장이다. 그래서 최소한 기다리는 순서와 짐표는 남겼다. 누군가 나중에라도 읽을 수 있게."
카세트는 거기서 잠깐 끊겼다가 더 낮은 목소리로 이어졌다.
"삭제 작업이 걸리면 관제에 장애 알림이 올라간다. 그 알림은 살아 있는 직원이 아니라, 마지막 승인자 이름으로 올라가게 묶어 놨다. 그래야 적어도 누군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가 그 알림을 자기 이름으로 남긴 이유가 그제야 이해됐다. 누군가 가족으로서, 혹은 직원으로서 이상함을 감지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플랫폼 맞은편 관리 부스에는 예전 방송실 장비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먼지 쌓인 마이크와 아날로그 시계 아래에 메모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은숙 씨가 알고 있다. 하지만 먼저 신호실.
은숙.
서진은 이름을 기억했다. 어릴 때 아버지와 같은 근무표에 자주 있던 안내방송 담당자였다. 퇴직 뒤엔 요양 중이라고 들었는데, 아버지 메모에 현재형으로 남아 있었다.
서비스 터널 쪽으로 걸어가자 벽면 단말기 하나가 갑자기 켜졌다. 작은 CRT 화면에 남은 시간이 떴다.
ARCHIVE PURGE / 00:41:12
기록 삭제까지 41분.
서진은 손전등을 쥔 채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엔 오래된 물때가 남아 있었고, 천장에서 떨어진 배관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고여 있었다. 터널 끝 신호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아버지 패스를 대자 이번에도 열렸다. 안쪽은 예상보다 넓었다. 선로 전환용 릴레이 판넬, 관제 우회 스위치, 그리고 중앙에 딱 세 개의 버튼만 남은 오래된 패널.
HOLD
PURGE
UPBOUND RESTORE
패널 아래에는 짧은 메모가 덧붙어 있었다.
상행 복구는 사람을 살리는 기능이 아니다.
명부와 짐표와 방송 기록을 지상 시스템으로 되돌리는 기능이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등록되지 않았지만, 받자마자 익숙하지 않은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동호 씨 딸이지요."
서진은 숨을 멈췄다.
"저는 옥은숙이에요. 방송실에서 일했어요. 지금 B4에 있지요?"
어떻게 아느냐고 묻기도 전에 노인은 급히 말을 이었다.
"올라가려면 그냥 버튼만 누르면 안 돼요. 먼저 방송 회선을 살려야 해요. 이름이 올라와야 기록이 사라지지 않아요. 신호실 오른쪽 패널 안에 노란 케이블 두 가닥이 있을 거예요. 그걸 연결하면 지상 전광판이 B4를 임시 열차로 인식해요."
서진은 곧바로 오른쪽 패널을 열었다. 안에는 낡은 회선 다발과 노란 케이블 두 가닥이 따로 묶여 있었다.
"그리고," 옥은숙이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 "서하늘은 사람 이름이에요. 마지막으로 여기서 못 올라간 아이 이름."
전광판 아래에서 보았던 한 줄이 갑자기 사람의 얼굴을 가지기 시작했다. 서진은 케이블을 손에 쥔 채 눈을 감았다. B4에 남은 건 추상적인 피해 집계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짐, 누군가의 호출 순서,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했던 아침이었다.
관리 패널의 카운트다운이 계속 줄었다.
00:18:09
서진은 노란 케이블을 꽂아 넣었다. 어둡던 방송 릴레이가 한 칸씩 살아났고, 신호실 위쪽 스피커에서 오래된 차임이 아주 작게 울렸다.
무영역 B4 상행 준비 중.
서진은 패널 위 손가락을 올린 채 한참 멈춰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말이 자꾸 맴돌았다. 상행 버튼은 사람을 되살리는 버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망자를 붙잡는 일이 아니라, 산 사람의 도시로 이름을 되돌리는 일일 것이다.
카운트다운이 10분 아래로 떨어졌다.
이번에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