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위의 자정 · 1화
여백 위의 자정, 첫 문장
비는 저녁부터 내렸지만, 윤해준의 서재에 닿을 무렵에는 마치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젖게 하려는 것처럼 두꺼워져 있었다.
서이안은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털고, 현관 앞에 붙은 작은 메모를 다시 읽었다.
`원고만 정리해 주세요. 서재 안쪽 책상은 건드리지 말 것.`
의뢰인은 해준의 출판사였다. 실종 신고가 들어간 지 스물사흘째, 가족도 소속사도 서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다는 이유로 유고 정리 외주를 맡겼다. 그게 이안의 일이었다. 남의 문장을 정리하고, 남의 흔적을 분류하고, 때로는 남이 끝맺지 못한 문단 끝에 가장 덜 잔인한 마침표를 붙이는 일.
문을 열자 눅눅한 종이 냄새와 아주 약한 잉크 냄새가 동시에 밀려 나왔다.
서재는 생각보다 단정했다. 벽을 따라 높은 책장이 둘러져 있었고, 바닥에는 봉인 스티커가 붙은 원고 상자가 세 개 놓여 있었다. 창문은 완전히 닫혀 있었는데도 커튼 끝이 조금씩 흔들렸다. 이안은 그 흔들림을 바람 탓으로 넘기고 조명을 켰다.
가장 안쪽, 창가와 직각으로 놓인 오래된 타자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검은 몸체에 금속 활자가 달린, 요즘에는 소품샵에서나 볼 법한 모델이었다. 책상 위에는 타자기와 반쯤 말라붙은 잉크병, 그리고 종이를 반쯤 끼운 채 멈춘 상태의 원고 한 장이 있었다. 출판사 메모에는 `안쪽 책상은 건드리지 말 것`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이안은 직업적으로 그런 문장을 믿지 않았다. 원고를 정리하려면 결국 마지막 페이지가 어디서 멎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이안은 우선 바닥의 원고 상자부터 열었다.
상자 안에는 윤해준 이름으로 출간된 장편 원고 초안과 교정지가 날짜별로 정리돼 있었다. 그중 가장 위쪽에 놓인 폴더는 출간되지 않은 신작이었다. 제목 란은 비어 있었고, 본문 첫 줄만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사람은 사라질 때 가장 먼저 자기 문장을 잃는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해준의 문장은 원래 더 건조했다. 차갑게 밀고 나가다가 마지막 문장에서만 심장을 건드리는 종류였다. 그런데 이건 이상할 만큼 체온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남기려는 문장 같기도 했고, 누군가를 밀어내려는 문장 같기도 했다.
그는 노트북을 꺼내 원고 분류표를 열었다. 언제나 하던 대로 파일명을 만들고, 페이지 수를 적고, 상태를 기록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빗소리는 창문에 더 낮고 무거운 리듬으로 달라붙었다.
스무 페이지쯤 읽었을 때, 이안은 처음으로 이상한 점을 느꼈다.
노트북 화면에 옮겨 적은 문장과 종이 위의 문장이 조금 달랐다.
방금까지 분명히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대개 마지막 인사를 남기지 못한다`고 읽었는데, 다시 보면 종이 위에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대개 마지막 문장을 남기지 못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안은 피곤해서 착각했나 싶어 미간을 눌렀다. 시계를 보니 11시 47분이었다. 출판사 담당자는 자정 전까지만 정리하고 나오라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 흐트러진 문장을 남겨둘 수는 없었다. 그는 커피 대신 미지근한 생수를 마시고 다시 활자 위에 시선을 내렸다.
11시 58분.
창문 바깥의 달이 고인 물 위에 겨우 얹힌 것처럼 흐릿했다.
이안은 마지막 상자를 열다 말고, 어딘가에서 아주 짧은 금속성 소리를 들었다. 딸깍.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대신 커튼 끝이 아까보다 더 크게 흔들렸다. 닫힌 창문 안쪽에서.
그는 천천히 안쪽 책상으로 걸어갔다. 타자기 롤러에 끼워진 종이는 희게 비어 있었고, 아래쪽 절반에는 아직 아무 글자도 없었다. 하지만 상단 여백, 제목을 적기도 애매한 그 빈 공간에 문장 하나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나를 끝까지 읽지 마.`
이안은 그대로 멈춰 섰다.
활자의 압흔이 너무 또렷했다. 방금 찍히지 않았다면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잉크가 진했다.
그는 타자기 옆 리본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렸다. 축축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여기 숨어 있다면 지금쯤 숨소리라도 들려야 했다. 그러나 서재에는 비 소리, 시계 초침, 그리고 자신의 숨뿐이었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빼냈다. 문장은 분명했다. 장난이라면 너무 공을 들였고, 우연이라면 기분 나쁠 만큼 정확했다.
그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출판사 편집자 유정이었다.
“아직 거기죠? 너무 늦지 않게 나오세요. 해준 작가 서재는… 이상한 얘기가 좀 많았거든요.”
“이상한 얘기요?”
전화 너머로 유정은 잠깐 말을 고르는 듯했다.
“실종 직전 한 달 동안, 작가님이 계속 원고 여백에 이름을 지우고 또 적었다는 얘기요. 교정쇄를 보내면 꼭 한 군데씩, 사람이름만 비워서 다시 돌려보냈대요.”
이안은 무의식중에 손에 든 종이를 더 세게 쥐었다.
“무슨 이름이었는데요.”
“그건 아무도 몰라요. 최종본엔 늘 비어 있었으니까.”
전화가 끊긴 뒤 서재는 전보다 더 고요해졌다. 이안은 출판사가 보낸 계약 서류 철을 꺼내 뒤적였다. 작가 실종 직전 작성된 추가계약서에 이상한 문장이 한 줄 있었다.
`저자 요청으로 특정 실명 표기를 전면 삭제함.`
그 아래, 볼펜으로 급히 덧붙인 메모가 있었다.
`마지막 문장은 남겨야 함. 그래야 돌아올 수 있음.`
이안은 등을 타고 식은 것이 천천히 내려가는 걸 느꼈다.
돌아올 수 있다니. 누가. 어디서.
그는 다시 타자기 앞에 앉았다.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꼭 끝까지 확인해야 하는 버릇이 있었다. 유고 정리를 오래 하면 생기는 직업병이었다. 남이 남긴 문장은 중간에서 끊어 두면 오히려 더 오래 따라왔다.
이안은 빈 종이를 새로 끼웠다. 손가락을 키 위에 올렸지만 아무 것도 누르지 않았다.
“윤해준 작가님.”
그는 스스로도 우스운 호칭이라 생각하면서 낮게 불렀다.
“장난이면, 별로 안 웃깁니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대신 창가에서 희미하게 바람도 아닌 소리가 났다. 서걱, 하고 종이장이 마찰하는 소리. 이안이 돌아보자, 아까 분류해 두었던 미출간 원고 한 장이 저절로 넘어가 있었다.
그 페이지의 마지막 줄은 반쯤 지워져 있었다.
`나는 네가 내 문장을 끝까지 읽기 전에 사라져야 했다.`
이안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자정이 넘어가는 순간, 책상 위 탁상시계가 아주 작게 한 번 울렸다.
그리고 타자기 키 하나가 스스로 내려갔다.
딸깍.
이안은 몸을 굳힌 채 활자 봉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하나, 둘, 셋. 금속 막대들이 번갈아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롤러가 아주 조금씩 밀렸다. 아무도 만지지 않았는데, 활자는 정확하고 집요하게 한 글자씩 종이를 눌렀다.
이번에는 속도가 더 빨랐다. 마치 망설임이 사라진 손처럼.
이안은 멍하니 그 움직임을 지켜봤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과 지금 눈을 돌리면 영영 놓친다는 생각이 동시에 스쳤다. 결국 남는 쪽은 늘 후자였다.
문장이 완성됐을 때, 서재는 다시 정적을 되찾았다.
`이번에는 네 이름을 쓴다, 이안.`
그 밑에 잠시 멈칫한 것 같은 간격이 하나 생기더니, 한 줄이 더 찍혔다.
`네가 지운 마지막 문장을 돌려놓아.`
이안은 자기 이름을 한참 바라봤다.
실종 작가의 서재에서, 아무도 누르지 않은 타자기 여백 위에,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밤의 죄목처럼 적힌 이름.
창밖에서 번개가 한번 번쩍였고, 그 빛이 유리창에 비친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안은 그 순간 아주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건 누군가 남긴 장난도, 오래된 활자의 오류도 아니었다.
윤해준은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 문장을 지운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빼앗겼다.
그리고 그 누군가 안에, 서이안 자신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