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으로 돌아가기
AI-Assisted
4분 분량2026년 4월 13일

여백 위의 자정 · 2

여백 위의 자정, 지워진 줄

읽기 설정

밤에 길게 읽기 전 화면을 눈에 맞춰 조정하세요.

서이안은 새벽 세 시가 넘도록 서재를 떠나지 못했다.

타자기에서 막 뽑아낸 종이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그 위에 적힌 두 줄은 조금도 가지런한 기분을 주지 못했다.

`이번에는 네 이름을 쓴다, 이안.`
`네가 지운 마지막 문장을 돌려놓아.`

이안은 몇 번이나 그 문장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물리적으로 사라지게 만들면 기분이라도 덜 나쁠까 싶었지만, 종이를 치울수록 오히려 서재 안 공기만 더 무거워졌다.

결국 그는 새벽까지 남기로 했다.

자신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이 일은 더 이상 남의 유고 정리가 아니었다.

책상 오른쪽 아래 서랍은 잠겨 있었다. 평범한 외주 교정자라면 그쯤에서 멈췄겠지만, 이안은 윤해준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많이 읽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해준은 자물쇠보다 습관을 더 믿는 사람이었다. 숨긴다면 대개 손이 가장 먼저 가는 곳 근처에 숨겼다.

타자기 아래를 손끝으로 더듬자 아주 얇은 금속 열쇠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서랍은 쉽게 열렸다.

안에는 노트나 현금 대신, 편집 로그가 인쇄된 종이철과 작은 카세트 플레이어 하나가 들어 있었다. 로그 첫 장에는 출판사 내부 시스템에서 뽑은 수정 이력이 날짜별로 적혀 있었다.

`8월 14일 23:41 / 요청: 마지막 문장 삭제`
`8월 17일 00:06 / 요청: 실명 삭제`
`8월 20일 00:11 / 요청: 마지막 문장 복구 보류`

이안은 세 번째 줄에서 시선을 멈췄다.

복구 보류.

문장을 고치는 업계에서는 흔한 표현이 아니었다. 보통은 수정, 삭제, 유지 셋 중 하나였다. 복구라는 말은, 한 번 지워진 것이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뜻에 가까웠다.

편집 로그 뒤편에는 해준의 손글씨가 붙어 있었다.

`자정이 지나면 여백이 먼저 알아본다. 이안이 오면 그때 보여 줘. 단, 대가를 감수할 것.`

그 아래 문장은 거의 긁어낸 것처럼 흐렸다.

이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 카세트 플레이어를 집어 들었다. 테이프에는 날짜도 제목도 없었다. 아주 작은 포스트잇에 단어 세 개만 적혀 있었다.

`그 밤 이전`

이안은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직거리는 잡음 뒤로, 윤해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안아.”

너무 익숙한 음성이어서 오히려 낯설었다. 머리로는 오래전부터 아는 이름처럼 들렸지만, 가슴은 처음 듣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움찔했다.

“네가 이걸 듣는다면, 나는 이미 마지막 줄을 혼자 못 지키고 있을 거다.”

숨이 얕아졌다. 이안은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내가 계속 이름을 지운 건, 네가 거기서 빠져야 책이 버틸 것 같아서였어.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끝내 못 지웠다. 네가 아니면 읽을 사람이 없어서.”

테이프가 잠시 멈칫했다. 바깥에서 빗물이 창틀을 두드렸다.

“대가가 시작되면, 네가 먼저 내 목소리부터 잃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조금만 빨리 와 줘.”

그 문장이 끝난 순간, 이안은 손에 들고 있던 플레이어를 거의 떨어뜨릴 뻔했다.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정확히 말하면, 방금까지 분명히 알던 감각 하나가 갑자기 자리째 비어 버렸다.

윤해준이 웃을 때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먼저 올라가던 입꼬리의 방향.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한 사람을 기억하는 데 이상할 만큼 중요한 사소함. 방금 전까지는 분명 떠오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억지로 끌어내도 손끝이 미끄러지듯 달아났다.

이안은 플레이어를 내려놓고 천천히 숨을 고르려 했다.

“대가.”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입에 너무 잘 붙었다. 처음 듣는 규칙이 아니라, 언젠가 이미 설명을 들은 적 있는 규칙처럼.

이안은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비에 젖은 유리 너머로 도시 불빛이 엉겨 있었다. 그런데 유리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또 하나 이상한 감각이 스쳤다. 해준이 이 창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뒷모습. 그 장면이 떠오르다 말고, 중간이 칼로 도려낸 것처럼 툭 끊겼다.

기억은 오려낸 필름처럼 중간만 사라질 때가 제일 끔찍했다.

아예 없으면 없는 줄이라도 아는데, 있었다는 흔적만 남고 내용이 빠진 기억은 사람을 계속 제자리에서 헛돌게 만들었다.

책상 위 타자기가 짧게 울렸다.

딸깍.

이안은 돌아섰다. 방금까지 멈춰 있던 활자 막대 하나가 느리게 올라가 종이를 눌렀다.

`왼쪽 아래 칸.`

이번에는 짧았다. 지시문에 가까웠다.

이안은 곧바로 책상 왼쪽 맨 아래 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묵직한 탄소 복사 원고 한 묶음과 종이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봉투 앞면에는 해준의 글씨로 짧게 적혀 있었다.

`발행 금지본 / 이안이 올 때만`

탄소 복사지를 넘기는 순간 잉크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원고 제목은 역시 없었다. 다만 첫 문장은 어딘가 기시감이 있었다.

`사람은 사랑보다 먼저 이름을 지우고, 그 다음에야 이별을 믿는다.`

이안은 페이지를 넘기다 멈췄다. 문장 중간중간, 누군가의 이름이 들어갔을 자리마다 가느다란 공백이 있었다. 단순한 삭제라기보다 처음부터 비워 두기 위해 아껴 쓴 여백 같았다.

마지막 장을 펼치자 더 이상한 것이 보였다.

원고 마지막 문단은 멀쩡했는데, 마지막 마지막 줄이 통째로 칼로 도려내진 것처럼 비어 있었다. 종이 결이 손으로 거칠게 찢은 자국과는 달랐다. 정확한 너비로 잘려 나간, 계획적인 공백이었다.

이안은 손끝으로 그 빈 줄을 따라 문질렀다.

순간 아주 짧은 환상이 스쳤다.

겨울이었다. 서재가 아니라 작은 편집실. 난방이 약해 손끝이 얼던 밤. 윤해준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아직 유명해지기 전이라 웃는 얼굴이 지금보다 훨씬 쉽게 무너지던 때.

그가 무언가를 말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 문장 직전에 기억이 검은 먹물처럼 번져 버렸다.

이안은 숨을 삼켰다.

“내가… 여기 있었어.”

눈앞의 빈 줄보다 더 무서운 건, 그 빈 줄에 자기 손이 닿아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지운 사람이 누군지 아직 떠오르지 않는데도, 종이의 감촉만큼은 익숙했다.

타자기는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연달아 움직였다.

딸깍, 딸깍, 딸깍.

활자가 종이를 찍는 소리가 방 안을 조용히 채웠다. 이안은 움직이지 못한 채 새 문장이 완성되는 걸 봤다.

`네가 마지막 문장을 지웠다.`

그 밑에 한 줄이 더 찍혔다.

`그 밤을 먼저 버린 쪽도 너였다.`

이안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분노보다 먼저 올라온 건 이상한 억울함이었다. 자기가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정작 무엇을 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 억울함. 죄책감조차 정확한 모양을 잡지 못한 채 가슴 안에서 거칠게 구르는 느낌.

그는 다시 테이프를 돌려 보려 했지만, 재생 버튼을 눌러도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헤드가 닳은 것도, 건전지가 다 된 것도 아니었다. 마치 방금 들은 문장만 남기고 나머지는 누군가 정교하게 지워 낸 것처럼 완전히 비어 있었다.

대가가 이미 지나간 뒤였다.

이안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만히 내려놓고 빈 마지막 줄을 다시 보았다.

자신이 지운 문장.

해준이 끝내 지우지 못했던 문장.

그리고 지금, 자정의 여백이 다시 돌려놓으라고 요구하는 문장.

비는 조금 약해졌지만 그 사실이 서재를 덜 음산하게 만들어 주진 못했다. 오히려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방 안의 사물들이 더 선명해져서, 남겨진 것과 지워진 것의 차이가 더 잔인하게 드러났다.

이안은 마지막 장을 접지 않았다.

그는 빈 줄이 보이도록 그대로 책상 위에 펼쳐 두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적어도 그 다짐만큼은 아직 자기 것이길 바라면서.

읽기 안내

문장의 호흡을 그대로

플롯룸은 챕터의 문단과 줄바꿈을 가능한 한 그대로 살려 둡니다. 작품으로 돌아가 다음 장면을 고르거나, 필요하면 신고 흐름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작 방식AI 보조 · 인간 편집 완료

인간 작가가 기획, 구조, 최종 문장을 다듬고 AI는 초안 변주나 문장 후보 생성에 보조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작가의 자가 선언입니다. 허위 공개가 확인되면 서가 퇴출과 작가 권한 제한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한 일

  • 세계관과 플롯 구성
  • 최종 문장 선택 및 편집
  • 회차별 결말과 호흡 조정

AI가 도운 일

  • 공개된 범위 안에서 자료조사, 아웃라인, 퇴고, 번역 보조
  • 일부 장면 초안 후보 생성
  • 문장 톤 변주

공개 전 확인

  • 권리와 독창성 검토
  • 설정 일관성 및 안전성 검토
  • 독서 전 AI 사용 정보 표시
AI 라벨 안내 보기

신고

이 챕터 신고

권리 침해나 안전 문제가 의심되면 이 챕터 단위로 바로 신고를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