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으로 돌아가기
AI-Assisted
5분 분량2026년 4월 13일

여백 위의 자정 · 3

여백 위의 자정, 마지막 줄

읽기 설정

밤에 길게 읽기 전 화면을 눈에 맞춰 조정하세요.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서재 안 공기는 이미 밤의 가장 깊은 부분을 지나고 있었다.

서이안은 탄소 복사 원고 마지막 장을 펼쳐 둔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마지막 문장을 지웠다.`

타자기가 남긴 그 문장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처럼 방 안에 눌어붙어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왜 지웠는지, 무엇을 지웠는지, 그리고 그게 윤해준의 실종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이안은 책상 위에 널린 기록들을 하나씩 다시 끌어당겼다.

편집 로그. 발행 금지본. 카세트 플레이어. 삭제 요청 메일 출력본. 그리고 첫 책 계약 당시의 수정 노트.

그중 가장 오래된 노트 뒤편에, 다른 문서들에선 보지 못했던 낡은 메모 한 장이 꽂혀 있었다. 종이는 습기를 먹어 가장자리가 일어나 있었고, 연필 글씨는 중간중간 번져 있었다.

`이안이 이 줄을 남겨 두면 책이 아니라 고백이 된다.`
`그래도 언젠가 돌려받고 싶다.`

그 아래에 덧붙인 듯한 짧은 문장 하나.

`지워도 여백은 남는다.`

이안은 그 메모를 읽는 순간 아주 오래 눌러 두었던 기억 하나가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걸 느꼈다.

겨울이었다.

눈은 오지 않았지만 창문이 하얗게 김이 서릴 만큼 추운 밤이었다. 그때도 책상 위에는 같은 타자기가 있었고, 윤해준은 원고 마지막 장을 들고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유명해지기 전이었고, 아직 둘 다 자기 문장이 이렇게 많은 사람의 생활을 바꿀 거라고 믿지 않던 때였다.

“이 줄, 남길 거예요?”

그때의 자신이 물었다.

해준은 잠시 웃었지만 끝까지 가벼운 얼굴은 아니었다.

“남기고 싶어.”

“그러면 책이 아니라 편지가 돼요.”

“그래도 네가 읽는다면 상관없지.”

그다음 장면은 오래도록 검게 끊겨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어둠이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이안은 마치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아주 조금 열리듯, 그 뒤의 장면을 천천히 떠올렸다.

자기 손이었다.

빨간 교정 펜이 마지막 줄 위를 가로질렀다. 그는 해준을 위해서라고 믿었다. 막 출간을 앞둔 책에 특정한 누군가를 가리키는 고백을 남기면, 사람들은 책보다 스캔들을 먼저 읽을 것이라고. 해준이 겨우 얻어낸 첫 독자들을 잃을 것이라고.

그래서 지웠다.

살리기 위해 지웠고, 지우면 끝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해준은 그 밤, 삭제된 마지막 줄 위에 손을 오래 올려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안아, 어떤 문장은 지워도 없어지지 않아.”

이안은 숨을 멈춘 채 눈을 떴다.

손끝이 차갑게 떨렸다. 죄책감이라는 말로는 모자랐다. 그날 자신은 해준을 배신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쪽을 골랐고, 가장 상식적인 결정을 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선택이 해준의 문장을 살린 대신, 해준 자신을 여백 안으로 밀어 넣었다면.

타자기가 다시 울렸다.

딸깍.

빈 종이를 끼워 두지도 않았는데 활자가 움직였다. 롤러에 걸린 지난밤의 종이 위로 새 문장이 눌렸다.

`마지막 대가는 네가 정한다.`

그 밑에, 한 줄.

`붙잡을지 돌려보낼지.`

이안은 천천히 타자기 앞에 앉았다.

“돌려보낸다는 게 어디로.”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이번에는 설명이 없어도 알 것 같았다.

지워진 채 남아 있던 문장들, 끝내 출간본에 실리지 못한 진심들, 그 모든 것이 여백에 달라붙어 윤해준을 붙잡고 있었던 거다. 해준이 사라진 건 도망쳐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워진 문장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그 안으로 먼저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필요한 건 추적이 아니라 복원이었다.

이안은 숨을 고르고, 발행 금지본 마지막 줄의 빈 공간 위에 새 종이를 겹쳐 올렸다. 활자판 위에 손가락을 얹자 오래된 금속이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한동안 어떤 문장을 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해준이 실제로 적어 두었던 마지막 문장을 완벽히 그대로 되살릴 자신은 없었다. 이미 몇 개의 기억은 대가로 빠져나갔고, 그 밤의 공기나 해준의 눈빛도 완전한 형태로는 붙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문장의 핵심은 분명했다.

그는 책을 쓰다가 이안을 사랑했고, 그 사실을 마지막 줄에서만큼은 숨기고 싶지 않았다.

이안은 천천히 첫 글자를 눌렀다.

딸깍.

`내가 끝내 남기고 싶었던 이름은 서이안이었다.`

활자를 하나 찍을 때마다 손끝에서 무엇인가 조금씩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특정한 장면이 아니라 감정의 온도에 가까웠다. 해준과 나란히 걸었을 때의 체온, 같은 원고를 사이에 두고 밤을 새우던 집중, 말을 아끼고도 서로를 거의 다 알던 그 시절의 촉감.

그런데 이상하게도, 완전히 잃는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세세한 부분은 흐려져도 문장의 핵심만은 더 또렷해졌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순간, 창문이 아주 조금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실제로 잠금장치가 움직인 건 아니었다. 닫힌 채인 창문 너머에서, 오래 걸려 있던 것이 비로소 풀리는 듯한 기척만 방 안에 스쳤다.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책상 맞은편, 창가와 책장 사이의 어둠 속에 사람 하나가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흐릿하고, 빗물에 번진 잉크처럼 가장자리가 옅었지만, 윤해준이라는 건 이상하게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는 예전처럼 웃지 않았다. 대신 아주 피곤한 사람이 마침내 짐을 내려놓을 때 짓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늦었네.” 이안이 중얼거렸다.

형태가 분명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대답은 들렸다.

`그래도 왔네.`

이안은 눈을 깜빡이지 못했다. 깜빡이는 순간 이 장면이 같이 지워질 것 같았다.

“왜 말 안 했어.”

`말했어. 네가 지웠지.`

책망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게 더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네 책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

잠깐의 정적 끝에 기척이 다시 스쳤다.

`알아. 그래서 네가 와야 끝난다고 생각했어.`

그 순간 이안은 해준이 왜 실종 직전까지 이름을 지우고 있었는지, 왜 마지막 원고만은 서재에 남겨 두었는지 전부 이해했다.

그는 이안을 다시 문장 안에 가두고 싶지 않았던 거다. 자신이 쓴 책 때문에, 자신의 사랑 때문에, 이안이 현실 바깥의 무엇으로 바뀌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은 지웠고, 마지막 줄만 남겼다. 언젠가 이안이 직접 선택하도록.

이안은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

“이제 어떻게 돼.”

창가의 형상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새벽 빛이 아주 미세하게 커튼 가장자리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문장은 남고, 사람은 가겠지.`

이안은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목 안이 먼저 무너졌다.

“그럼 나는 널 다 잊어?”

이번 대답은 한참 뒤에야 들렸다.

`다는 아니야. 다 잊으면 네가 다시 못 읽잖아.`

그건 위로인지 농담인지 애매한 말이었지만, 해준다운 방식이었다. 이안은 결국 웃는 것과 우는 것 사이 어딘가의 표정을 지었다.

형상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창가에 기울었다. 아주 짧게, 누군가 오래 고민한 끝에 결국 아무 말도 더 보태지 않기로 한 사람처럼.

그리고 사라졌다.

방 안에는 더 이상 기척도, 활자 소리도 남지 않았다. 다만 타자기 앞 종이 위에 방금 이안이 직접 적은 마지막 줄과, 그 아래 이전에는 없던 작은 덧문장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제 끝까지 읽어도 된다.`

이안은 그 문장을 오래 내려다봤다.

해가 떠오를 무렵, 비는 완전히 그쳤다.

그는 서재 창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가 젖은 종이 냄새와 뒤섞여 들어왔다. 어젯밤 내내 자신을 옥죄던 방 안의 공기가 그제야 조금 풀렸다.

이안은 노트북을 켜고 발행 금지본 마지막 페이지를 새 파일로 옮기기 시작했다. 삭제본이 아니라 복원본으로. 윤해준이 끝내 못 낸 마지막 원고를, 그가 가장 숨기고 싶으면서도 가장 남기고 싶었던 문장까지 포함해서 정리했다.

출판사에는 아침 여덟 시가 조금 넘어 메일을 보냈다.

`실종 전 마지막 원고 정리 완료. 본문 말미에 복원된 마지막 줄이 있습니다. 삭제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건 책의 결말이 아니라, 저자가 끝내 남긴 증언에 가깝습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이안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해준의 얼굴은 이미 정확하지 않았다. 웃을 때 어느 쪽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는지도, 커피에 설탕을 넣었는지도 흐릿했다. 아마 그건 다시 또렷해지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관없었다.

사람을 끝까지 붙잡지 못해도, 문장을 끝까지 지켜 낼 수는 있었다.

이안은 타자기 위 마지막 종이를 한 번 더 바라봤다.

`이제 끝까지 읽어도 된다.`

그는 그 문장을 조심스럽게 접어 원고 맨 앞장 안쪽에 끼워 넣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소설의 마지막 줄처럼 읽히겠지만, 자신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끝내 쓰인 마음은, 사라진 사람보다 더 오래 남기도 하니까.

읽기 안내

문장의 호흡을 그대로

플롯룸은 챕터의 문단과 줄바꿈을 가능한 한 그대로 살려 둡니다. 작품으로 돌아가 다음 장면을 고르거나, 필요하면 신고 흐름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작 방식AI 보조 · 인간 편집 완료

인간 작가가 기획, 구조, 최종 문장을 다듬고 AI는 초안 변주나 문장 후보 생성에 보조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작가의 자가 선언입니다. 허위 공개가 확인되면 서가 퇴출과 작가 권한 제한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한 일

  • 세계관과 플롯 구성
  • 최종 문장 선택 및 편집
  • 회차별 결말과 호흡 조정

AI가 도운 일

  • 공개된 범위 안에서 자료조사, 아웃라인, 퇴고, 번역 보조
  • 일부 장면 초안 후보 생성
  • 문장 톤 변주

공개 전 확인

  • 권리와 독창성 검토
  • 설정 일관성 및 안전성 검토
  • 독서 전 AI 사용 정보 표시
AI 라벨 안내 보기

신고

이 챕터 신고

권리 침해나 안전 문제가 의심되면 이 챕터 단위로 바로 신고를 남길 수 있습니다.

여백 위의 자정, 마지막 줄 | 여백 위의 자정 | Plotlo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