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탑의 패치노트 · 1화
1화. 종료되지 않은 레이드
비가 그친 새벽, 서언의 작업대 위로 회색 봉투 하나가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잠금 장치를 손보던 나사가 데구르르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바로 주우러 가지 못했다. 봉투 앞면에는 수신인도 발신인도 없이 단 한 줄만 인쇄되어 있었다.
[패치노트 배포 대상: 생존 지원 유닛 서언]
서언은 한참 동안 봉투를 뜯지 못했다. 죽은 탑에서 살아 나온 뒤로 그는 시스템 문자 비슷한 것만 봐도 손끝부터 굳었다. 사람들은 그를 “23차 공략전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불렀고, 더 솔직한 사람들은 “버프 타이밍을 망쳐 전멸을 만든 서포터”라고 불렀다. 정확히 일 년 동안 그는 폐탑 인근의 수리점 뒤방에 숨어, 고장 난 마도구와 말 없는 생활만 고쳐 왔다.
결국 봉인을 뜯자 종이는 기묘할 만큼 따뜻했다. 막 인쇄한 영수증처럼 미세한 열이 남아 있었다.
[Resolved]
- 모험가 #114 사망 플래그 지연 반영 문제 수정
[Known issue]
- 17층 관리 잔향이 예비 마력을 계속 소비하고 있음
- 28층 전투 기록 일부가 승인되지 않은 방식으로 수정됨
[Action required]
- 생존 지원 유닛 서언의 현장 확인이 필요함
맨 아래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탑에 입장하던 날 사용했던 레이드 인증 번호가 찍혀 있었다. 폐기된 지 오래인 번호였다. 서언은 종이를 접지 못한 채 그대로 들고 서 있었다. 누가 이런 장난을 치든,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그는 수리점 셔터를 내리고 탑 외곽으로 향했다. 탑은 도시 북변의 매립지 한가운데 서 있었다. 검은 벽면은 아직도 젖은 쇠 냄새를 풍겼고, 봉쇄용 성역 사슬은 1년 전과 똑같이 감겨 있었다. 그런데 정문 앞 검문 말뚝에 종이를 가까이 대자, 표면에 희미한 빛이 번졌다. 닫혀 있던 봉인 문장이 한 줄씩 밀리더니, 마치 오래된 오류를 인정하듯 틈이 열렸다.
“지금 와서 나보고 뭘 하라고.”
대답은 없었다. 대신 탑 안의 어둠이 그를 받아들였다. 1층 로비는 이상할 정도로 깔끔했다. 마지막 공략의 피자국도, 무너진 석상 조각도 없었다. 대신 모든 것이 너무 가지런해서 더 소름 끼쳤다. 청소된 것이 아니라, 최후의 순간이 통째로 저장된 뒤 반복 재생되는 것 같았다. 벽등은 한 박자 늦게 켜졌고, 안내 패널의 금빛 글자는 서언이 지나간 뒤에야 따라오듯 떠올랐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참에서 두 번째 패치 메모가 허공에 나타났다. 종이도 아니고 창도 아닌, 반쯤 투명한 문장 덩어리였다.
[Hotfix pending]
- 지원 유닛이 현장에 진입함
- 잔향 동기화가 재개됨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서언의 뒷목이 차갑게 식었다. 잔향. 시스템은 죽은 사람의 흔적을 그렇게 불렀다. 탑은 오래전부터 몬스터뿐 아니라 인간의 전투 기록도 저장했다. 공략대가 완전히 전멸한 경우에만, 그 마지막 수초가 안전장치처럼 남는다는 이야기를 그는 교육용 매뉴얼에서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살아남은 쪽은 늘 다시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17층으로 향하는 승강기는 여전히 작동했다. 금속 상자 안에서 서언은 자기 얼굴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문이 열리자 냉기보다 먼저 목소리가 들렸다.
“서언, 증폭 앰플 하나 더!”
한세린의 목소리였다.
승강기 문턱 너머, 17층 전투장은 마지막 공략이 중단된 순간 그대로 멈춰 있었다. 검은 갑주의 잔향들이 벽 쪽에서 끊어진 자세로 얼어 있었고, 그 중앙에서 세린이 검을 들고 돌아섰다. 아니, 세린의 잔향이. 그녀의 어깨에는 마지막 날 찢겼던 망토 자락이 그대로 걸려 있었고, 눈동자는 살아 있을 때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발밑 그림자가 반 박자 늦게 따라오고 있었다.
서언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을 찾았다. 이미 공략대 장비는 전부 반납했는데도, 몸은 그날의 리듬을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왜 늦었어?”
세린의 잔향이 그렇게 묻는 순간, 서언은 자신이 아직도 그 레이드 안에서 한 발도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말에는 원망보다 익숙함이 먼저 담겨 있었다. 그래서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의 뒤편 벽면 패널이 깜빡이며 새 문장을 토해 냈다.
[Critical]
- 17층 관리 잔향이 대기 중
- 지원 유닛의 응답이 필요함
서언은 봉투를 구겨 쥔 손을 천천히 폈다. 탑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