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탑의 패치노트 · 3화
3화. 롤백 대신 복구
28층 관리실은 보스룸보다 더 조용했다. 벽면 전체를 뒤덮은 기록판에는 수천 줄의 공략 로그가 겹겹이 쌓여 있었고, 중앙의 심장핵은 꺼진 것처럼 보이면서도 아주 느리게 박동하고 있었다.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서언의 손등 문양이 푸르게 빛났고, 기록판 한가운데 붉은 창 하나가 떠올랐다.
[Emergency recovery proposal]
- 마지막 정상 시점으로 롤백 가능
- 전멸 이전 상태 복원 가능
- 현재 시점의 부수 피해는 보장되지 않음
서언은 그 문장을 한 줄씩 읽고도 한참 말이 없었다. 롤백. 탑은 아직도 그 선택지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승인을 누르면, 23차 공략 직전의 상태를 복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세린도, 다른 대원들도, 탑 안에서는 살아 있는 상태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아래 작은 회색 글씨가 그 환상을 찢고 있었다.
현재 시점의 부수 피해는 보장되지 않음.
그 말은 곧, 지난 1년 동안 살아남은 사람들의 시간도 함께 지워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죽음을 취소하는 대신 삶의 일부를 갈아 넣는 선택. 탑다운, 효율적인 제안이었다.
“하지 마.”
세린의 목소리가 관리실 스피커를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17층에 남아 있는 잔향인데도, 유지보수 권한이 연결된 탓인지 아주 멀리서 말을 거는 것처럼 전달됐다.
“네가 원하면 다들 돌아올 수도 있어.”
“그건 돌아오는 게 아니야. 탑이 마지막으로 저장해 둔 순간을 다시 틀어 주는 거지.”
서언은 눈을 감았다. 일 년 전 그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단 한 번만 다시 앰플을 던질 수 있다면, 단 한 번만 더 세린의 욕설을 제대로 알아듣고 후방 통신을 끊어낼 수 있다면. 하지만 그것은 복구가 아니라 부정이었다. 산 사람의 시간도, 죽은 사람의 최후도 모두 없는 일로 만드는 식의 친절.
그는 롤백 창을 닫고 기록판 가장 아래로 손을 뻗었다. 거기에는 아직 승인되지 않은 감사 로그들이 봉인된 채 매달려 있었다. 후원 길드의 이름, 차단된 채널 번호, 현장 승인에 사용된 외부 권한 토큰. 전부 남아 있었다. 다만 누군가 읽지 못하게 접어 두었을 뿐이었다.
문양이 새겨진 손으로 봉인을 누르자, 기록판 전체에 균열 같은 빛이 퍼졌다. 숨겨진 로그들이 한 줄씩 펼쳐지기 시작했다.
23차 공략전 보고서.
회복 계통 강제 차단 승인자.
심장핵 우선 회수 지시.
전투 로그 수정 요청.
생존자 책임 전가 초안.
서언은 끝까지 읽고 나서야 손을 떼었다. 화가 났지만, 그보다 먼저 찾아온 감정은 이상할 만큼 차가운 안도였다. 적어도 자신이 기억을 잘못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진짜로 기록을 잘라 냈고, 그 틈에 그의 죄책감을 눌러 넣었다.
관리실 바닥 한복판에서 심장핵이 낮게 울렸다. 이제야 선택하라는 듯.
[권장 절차]
- 롤백
- 보류
- 복구
서언은 세 번째 항목 위에 손을 올렸다.
“복구.”
즉시 심장핵 둘레에 감겨 있던 봉인이 천천히 풀렸다. 기록판 상단에는 전멸 처리됐던 대원들의 이름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사망 기록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조작되었던 주석이 걷혔다. 실패 원인도 함께 표기됐다. 한세린, 민규혁, 오연서, 서언. 누구도 버프 실패로 죽지 않았다. 스폰서 권한 개입으로 인한 회복선 차단, 그게 공식 원인으로 새겨졌다.
17층 스피커 너머에서 세린이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이제 밖에서도 보이겠지?”
서언은 기록판 하단에 마지막 승인 문장을 써 넣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글자가 시스템 폰트가 아니라 사람 손글씨처럼 흔들렸다.
‘23차 공략전의 생존자는 책임자가 아니라 증인이다.’
문장이 새겨지자 탑 외벽 전체가 한 번 울렸다. 동시에 관리실 천장에 붙어 있던 보조 패널이 켜졌다. 도시 쪽 공용 감시망으로 연결된 출력 창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끊어 두었던 통신이 복구되며, 방금 승인된 감사 로그가 외부 전송 대기 상태로 넘어갔다.
그 순간 서언은 세린이 왜 “제일 싫어할 방식으로 공개하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탑 안의 진실을 탑 밖으로 밀어내는 것. 그것이 가장 느리고도 가장 확실한 복수였다.
심장핵 앞에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Restore complete]
- 전투 기록 복구됨
- 조작된 주석 제거됨
- 임시 유지보수 담당자 지정: 서언
그리고 한 줄이 더 추가됐다.
[Next patch scheduled]
- 18층 생존 구역에서 승인 대기 중인 요청 1건 발견
서언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끝난 줄 알았던 탑은 이번에도 끝나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그가 다시 승강기 쪽으로 돌아설 때, 관리실 유리 벽에 자기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일 년 만에 처음으로 그는 그 얼굴이 패배한 사람의 얼굴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17층 연결 채널 너머에서 세린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다음엔 늦지 마.”
서언은 아주 작게 웃었다.
“이번엔 패치노트가 먼저 오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