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수되지 않는 음성메모 · 2화
회수되지 않는 음성메모, 12번 사물함의 파도
막차가 역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때, 시청역 플랫폼은 잠깐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낮 동안 사람들로 닳아 있던 바닥이 텅 비자, 천장 조명 아래 남은 먼지와 습기만 떠다녔다. 윤미나는 노란 안전선 뒤에 서서 전광판의 시간을 올려다봤다. 00:58. 문이 닫히고 열차가 터널 속으로 사라지자, 역은 곧바로 어두운 수조처럼 조용해졌다.
주머니 속 12번 열쇠표가 손바닥을 차갑게 눌렀다.
메모는 `막차 들어오기 전에 열지 마.`라고 했다. 그럼 이제는 열어도 된다는 뜻일까. 아니면 지금부터 진짜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뜻일까. 미나는 스스로에게 대답하지 못한 채 보관함 구역으로 걸어갔다.
시청역의 사물함 복도는 밤이 되면 생각보다 길었다. 자동판매기 불빛이 끝나고, 안내 방송도 끊긴 구간에 12번 사물함이 있었다. 다른 문들보다 조금 더 낡고, 손잡이 주위의 도장이 여러 번 다시 칠해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미나는 열쇠표를 대고 숨을 골랐다.
철컥.
문이 열리자 아주 약한 소금기 냄새가 흘러나왔다. 바다에서 갓 돌아온 우비를 좁은 방 안에 오래 말렸을 때 나는 냄새였다. 안쪽에는 검은 천가방 하나와, 종이봉투, 낡은 이어폰, 휴대 녹음기 한 대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종이봉투 겉면에는 익숙한 필체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엄마가 잘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미나는 봉투를 열지 못하고 그대로 녹음기부터 집어 들었다. 화면은 꺼져 있었지만 배터리 표시등만 희미하게 깜빡였다. 전원을 누르자 저장 목록이 떴다.
`HOME_01`
`HOME_02`
`BUS_03`
`KITCHEN_07`
`MOTHER_LAUGH`
`MINA_HUMMING`
목록을 보는 순간, 미나는 팔뚝 안쪽이 서늘해졌다.
준오는 원래도 길 위의 소리를 오래 모았다. 쓸모없어 보이는 소리를 꼭 파일명까지 다정하게 적어 두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건 취미의 기록처럼 보이지 않았다. 너무 정돈돼 있었고, 빠진 것이 없도록 골라 모아 둔 목록 같았다.
미나는 이어폰을 꽂고 첫 파일을 눌렀다.
처음 들린 건 집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비닐봉지가 문고리에 스치는 소리, 구두 밑창에 묻은 모래가 털리는 소리, 그리고 그다음 어머니가 부엌 쪽에서 묻는 목소리.
“준오 왔니?”
어머니의 목소리는 지금보다 훨씬 또렷했다. 듣는 사람까지 따라 웃게 만드는 둥근 끝음. 냉장고 문 여는 소리, 컵을 식탁에 놓는 소리, 멀리서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 웃음소리가 작게 깔렸다. 그 사이로 준오가 `엄마, 물 말고 보리차 있어?`라고 묻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미나는 이어폰을 뺐다. 너무 빠르게 심장이 뛰었다.
준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모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의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집이라는 장소 전체의 소리를. 사라지면 다시는 똑같이 들을 수 없는 일상의 층을 통째로.
미나는 사물함 옆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음 파일을 눌렀다.
이번엔 버스 정류장이었다. 겨울 아침 광고 방송, 멀리서 달리는 버스 엔진, 그리고 코트를 여미며 투덜대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
“오빠, 이렇게 추운데 왜 굳이 녹음까지 해야 돼?”
그 뒤로 준오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것도 곧 없어질지 누가 알아.”
미나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분명 자기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장면 속 준오가 어떤 얼굴로 웃고 있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문장을 들었고, 톤도 알겠고, 타이밍도 알겠는데 얼굴만 비어 있었다. 1화에서 두 번 들었던 메모의 대가가, 지금도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는 걸 그는 그때 확실히 알았다.
가방 맨 안쪽에는 오래된 병원 안내문이 한 장 접혀 있었다. `청력 보존 경과 관찰`이라는 제목 아래 어머니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진료 날짜는 준오가 떠나기 몇 달 전. 하단 메모란엔 준오의 필체로 짧게 덧붙은 문장이 있었다.
`들릴 때 남겨 두기. 나중엔 소리보다 표정만 기억날 수도 있음.`
미나는 종이를 쥔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어머니는 요즘 자꾸 텔레비전 볼륨을 올렸다. 문밖에서 부르면 바로 대답하지 않는 날이 늘었다. 그런데도 미나는 병원 기록을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괜찮다고 했고, 준오가 챙기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어쩌면 준오는 자기 혼자서 시간을 먼저 알아차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사라지기 전에, 닳아 없어지기 전에, 누군가의 일상을 통째로 보관해야 할 시간이 왔다는 걸.
그날 밤 미나는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다시 아카이브로 돌아왔다. 지하 3층 복도는 새벽 한 시를 넘기며 더 깊은 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녹음기와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자, 모니터에 알림이 하나 더 떠 있었다.
`수동 확인 필요 / 새 음성메모 1건`
미나는 이번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잃고 있는 이상, 확인하지 않는 쪽이 더 비겁하다고 느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이전보다 짧고 가까운 준오의 숨소리가 흘렀다.
“잘 갔네.”
미나는 눈을 감았다. 방금 그 한 문장만으로도 울컥했지만, 이상하게 목 안에서만 아프고 눈은 마르지 않았다.
“거기 있는 거, 엄마 들으라고 모은 거 맞아. 내가 계속 늦었지. 병원도, 바다도, 다 조금씩.”
준오는 잠깐 말을 멈췄다. 녹음기 저편으로 아주 작은 파도 소리가 스쳤다. 미나는 그 소리의 배경을 알고 싶었지만, 동시에 준오의 호흡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나 메모가 이어질수록 그의 목소리를 붙잡는 감각이 손가락 사이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다음은 엄마랑 같이 와. 혼자 오면 안 돼.”
모니터 한구석의 파형이 짧게 떨렸다.
“새벽 4시 10분. 동해전망대.”
메모가 끝나자 미나는 입술 안쪽을 세게 물었다. 이번에는 대가가 더 분명했다. 준오가 웃을 때 꼭 섞이던 숨 섞인 짧은 소리, 문장 끝에서 약하게 올라가던 리듬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빠져나갔다. 그는 기억 속 준오의 웃음을 재현하려 해봤다. 실패했다. 소리 없는 입 모양만 남고, 그 안을 채우던 진짜 울림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나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울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비어 버린 자리를 확인하지 않으려고.
책상 위 종이봉투를 그제야 열었다. 안에는 짧은 메모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미나야, 엄마는 네가 같이 있어야 제대로 들을 거야. 나 대신 오늘의 소리를 하나만 더 남겨 줘.`
아카이브실 공조기가 낮게 돌아갔다. 서버 팬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렸다. 누군가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기계음이었지만, 미나는 문득 그 소리들이 아주 나중엔 그리워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준오가 왜 그렇게 사소한 것들을 모았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는 천천히 봉투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동해전망대까지는 첫차와 새벽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어머니를 설득해야 하고, 병원 기록을 보여 줘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4시 10분 전까지 도착하려면 지금부터 움직여야 했다.
미나는 모니터를 끄고 녹음기를 가방 안에 넣었다. 그런데 자리를 뜨기 전, 마지막으로 아주 사소한 것이 걸렸다. 준오가 아까 메모에서 웃었는지조차 이제는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상실 중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깊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미나는 휴대폰 녹음 앱을 켰다. 그리고 텅 빈 복도 쪽을 향해 아주 낮게 말했다.
“준오야, 이번엔 내가 이어서 녹음할게.”
저장 버튼이 눌리는 짧은 전자음이 새벽 공기 속에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