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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 분량2026년 4월 23일

꼴찌 분대는 새벽에 사라진다 · 2

2화. 탈영병은 다시 입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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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영병 한기준은 죽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한기준으로 살지도 못했다.

그는 인천 외곽 냉동창고에서 김우철이라는 이름으로 일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숙소를 옮겼다. 휴대전화는 늘 선불이었고, 주민등록번호를 묻는 일자리는 피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그냥 말수 적은 일용직으로 통했다. 밤마다 스피커 잡음만 들려도 몸이 먼저 깼고, 누군가 금속 발판을 접는 소리만 내도 식은땀이 났다.

그래도 시간은 사람을 조금씩 속였다. 도망치면 끝날 줄 알았던 공포가, 언젠가부터는 익숙한 그림자처럼 뒤에 붙어 있기만 했다. 기준은 그걸 견디는 법을 배웠다고 착각했다.

동생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어느 비 오는 새벽, 어머니가 남긴 음성메시지가 선불폰으로 도착했다. 몇 달째 연락을 끊고 살았던 기준은 처음엔 번호부터 의심했다. 하지만 재생 버튼을 누르자 들려온 건 분명 어머니 목소리였다. 피곤하고 쉰 목소리, 그래도 마지막에 누구 걱정부터 하는지 늘 티 나는 사람의 목소리.

“기준아, 네가 어디 있든 한 번만 확인해 줘. 시윤이 입영 통지서가 나왔다. 이상한 부대래. 요즘 성적 좋은 애들만 남기고 아닌 애들은 다른 데로 돌린다더라는데, 엄마는 그 말이 왜 그렇게 무섭니.”

통화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아마 중간에 배터리가 나갔거나, 울음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시윤은 기준보다 여섯 살 어렸다. 어릴 때부터 겁이 많고, 남이 다친 걸 못 지나치는 애였다. 기준이 초등학생 때 다리 부러진 비둘기를 주워 오면, 끝까지 약을 갈아 먹이고 상자를 바꿔 주던 쪽은 시윤이었다. 그런 애가 31 전환전력교육대 같은 곳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자 기준은 손에 들고 있던 작업용 갈고리를 떨어뜨렸다.

그날 밤 그는 냉동창고를 그만두고, 가짜 이름으로 빌린 방을 정리하고, 오래전에 묻어 둔 군번줄 한 쌍을 찾아냈다. 하나는 원래 자신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리동으로 끌려가던 박용현이 복도에서 떨어뜨린 것이었다. 기준은 그 둘을 함께 손바닥에 올려놓고 오래 들여다봤다. 살아남았다는 이유 하나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기엔, 이제 동생이 너무 가까이 그 문턱에 와 있었다.

그는 다음 날 오전 스스로 헌병대 지역사무소를 찾아갔다.

접수창구 하사는 탈영병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걸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기준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기준이라고, 제31 전환전력교육대에서 탈영했다고, 동생 입대 통지서를 보고 왔다고 말했다. 그가 기대한 건 곧바로 영창이나 수갑 정도였다. 하지만 사무실 안쪽에서 나온 중령은 다른 서류를 꺼냈다.

“복귀 재편입 제도.”
그가 종이를 탁자 위에 밀었다.
“네가 본 건 국가기밀에 해당한다. 기밀 노출 이력이 있는 이탈자를 외부 군사재판으로 넘기면 설명해야 할 게 너무 많아진다. 그래서 복귀자는 ‘내부 재편입 자원’으로 분류한다. 조건은 하나다. 다시 시험장을 통과하는 것.”

“같은 부대로 보내겠다는 겁니까?”

“너는 이미 거기 시스템을 안다. 상부는 그 점을 오히려 장점으로 본다. 실패한 적이 있는 자가 다시 올라오는지 관찰하는 것도 평가 항목이니까.”

기준은 종이를 끝까지 읽지 않았다. 조건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시윤이 이미 그 부대로 배정됐다면, 기준이 갈 수 있는 유일한 곳도 그곳뿐이었다.

사흘 뒤, 그는 다시 같은 위병소 앞에 서 있었다. 철문, 감시 카메라, 언덕 아래 낮은 건물, 바람 방향까지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기준 자신이었다. 처음 입대하던 날의 그는 규칙이 사람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조금은 믿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규칙이 사람을 없애기 위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윤은 생활관에서 형을 보자마자 얼굴이 새하얘졌다.

“형… 살아 있었어?”

그 말에는 반가움보다 분노가 먼저 섞여 있었다. 기준은 그걸 이해했다. 가족들은 그가 도망친 뒤 공식적으로는 실종 통보만 받았을 것이다. 시윤이 형을 살아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설명은 나중에 할게.”
기준이 낮게 말했다.
“일단 내가 하는 말만 들어. 여기선 꼴찌가 단순히 벌 받는 게 아니야.”

시윤은 처음엔 비웃었다. “형도 군대 악몽 아직 못 벗은 거 아니야?”

하지만 기준은 웃지 않았다. 그 표정 하나로 동생의 입술이 굳었다.

31 교육대의 시험 체계는 겉으로 보기엔 이전과 같았다. 레이저 소총, 목적지 돌파, 깃발 탈환. 다만 기준은 এবার 전광판 뒤에 숨은 계산식을 볼 수 있었다. 복귀자 신분으로 지급된 팔찌에는 별도 접근 권한이 붙어 있었고, 야간 정비구역을 드나들 때마다 서버 패널이 조금씩 열렸다. 점수표에는 명중률과 기동성만 있는 게 아니었다. 명령 복종 속도, 부담 자원 절감률, 부상자 방기 허용치 같은 항목이 숨어 있었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지표가 아니라, 버릴 사람을 효율적으로 고르는 지표였다.

며칠 뒤 기준은 정비실 모니터에서 파일 하나를 열게 됐다.

[APTITUDE REALLOCATION EFFICIENCY PLAN]
- elite retention target: top 22%
- auxiliary transfer target: 18%
- nonrecoverable attrition allowance: bottom 60%
- hall throughput optimization: Q3 target +14%

처음엔 무슨 뜻인지 바로 읽히지 않았다. 문서 어디에도 ‘처형’이나 ‘폐기’ 같은 단어는 없었다. 대신 회복 불가, 이탈 허용치, 처리 효율 같은 말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러나 숫자들이 가리키는 끝은 너무 분명했다. 하단 서명란에는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정민석 소령.

그날 저녁 시윤의 분대가 마지막 시험에서 꼴찌를 했다.

이유는 너무 시윤답고, 그래서 더 끔찍했다. 목적지 돌파 중 다른 분대 훈련병 하나가 발목을 접질렀고, 시윤은 명령선을 이탈해 그를 부축했다. 기록실은 그 행동을 협동이 아니라 지연으로 계산했다. 전광판에 최하위 표시가 뜨는 순간 기준은 심장이 오래전에 한 번 멎었던 것처럼 식어 가는 걸 느꼈다.

생활관 복도 끝 게시판에는 밤 아홉 시에 새 명령서가 붙었다.

[7분대 / 05:10 / 정리동 이동]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마지막 종교 의식 희망 여부를 사전 제출할 것.

시윤은 기준을 보지 않았다. 다른 훈련병들 앞에서 겁먹은 얼굴을 보이기 싫었을 것이다. 대신 잠자리에 들기 직전, 이를 꽉 문 채 낮게 말했다.

“형 말이 맞으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해.”

기준은 잠깐 대답하지 못했다. 탈영은 혼자 사는 데는 도움이 됐지만, 사람을 구하는 기술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망만 칠 수 없었다. 동생이 자기 눈앞에서 같은 줄에 서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침상 아래에 숨겨 둔 군번줄 두 개를 꺼내 시윤 손에 하나를 쥐여 줬다.

“이번엔 빠져나오는 걸로 안 끝낼 거야.”

시윤이 형을 쳐다봤다. 공포와 분노가 뒤엉킨, 그러나 아직 꺼지지 않은 눈빛이었다.

“그럼 뭘 할 건데.”

기준은 생활관 천장의 비상 안내 스피커를 올려다봤다. 저 스피커가 한 번만 제대로 세상 바깥으로 연결되면, 정리동의 문은 더 이상 조용히 닫히지 못할 것이다.

“내일 새벽 전에, 저 사람들이 숨겨 온 점수표부터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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